top of page
조평세

미국 독립선언문(1776)에 나타난 기독교세계관

자유민주공화정 체제를 가장 완전하게 구상한 정치문헌을 꼽으라면 단연 미국의 독립선언문(1776)과 헌법(1787), 그리고 수정헌법 1조부터 10조를 뜻하는 권리장전(1789)이다. 미국의 이 3대 건국문헌(founding documents)들을 통틀어 자유의 헌장(Charters of Freedom)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중에서 특히 미국 독립선언문은, 비록 영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포한 문헌이지만, 영국의 대헌장(1215)부터 시작된 헌정주의 전통과 정치철학 그리고 자연권 사상을 가장 간결하고 명료하게 총망라한 걸작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종종 간과되는 더 중요한 사실은, 이 독립선언문의 첫 문단부터 마지막 문단까지 부정할 수 없는 심오한 성경적 가치관이 심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 문헌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가장 기독교 신앙이 깊지 않았다고 알려진, 심지어 이신론주의자였다고까지 (잘못) 평가받는 토마스 제퍼슨에 의해 초안이 써졌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담긴 기독교 세계관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건국정신과 공화국 체제 형태를 본 따 세운 자유민주공화국이지만, 지난 수십 년간 우리가 가진 자유를 틈타 들어온 거짓세력들에 의해 현재 무신론적 사회주의의 길로 빠르게 폭주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하나님과 자유를 사랑하는 대한민국의 크리스천들은 미국의 건국정신을 가장 잘 담아내고 있는 독립선언문을 깊게 살펴보고 자유민주공화정의 기독교 세계관적 배경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자연의 법과 자연의 하나님의 법”

불과 1,337개 단어로 이루어진 간결하지만 강력한 이 선언문은, 먼저 첫 문단에서 이 선언을 만국 일반에 공표하는 맥락을 설명한다.


"인간사의 과정에서 어느 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타자에게 얽매이게 하는 정치적 속박을 해체하고, 그리하여 스스로 지상의 열강들에 끼어 자연의 법과 자연의 하나님의 법에 따라 마땅한 독립적이고 동등한 입지를 차지하는 것이 필요하게 될 때는, 인류의 의견들을 예절 있게 존중하면서 자신들이 독립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선언해야만 한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바로, 그들이 독립적이고 동등한 입지를 추구하는 것이 “자연의 법과 자연을 지으신 하나님의 법(the laws of nature and of nature’s God)”에 의거하여 마땅한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세속적 수정주의 의도를 가진 학자들은 이 “자연의 법과 자연의 하나님의 법”이라는 표현이 유대-기독교 전통의 인격적 하나님이 아닌 계몽주의 철학에서 비롯된 추상적 이신론의 신에 대한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여러 측면에서 잘못된 억지 해석이다.


우선 제퍼슨은 이 표현을 존 로크(1632~1704)의 <통치론1>에 나온 두 종류 법의 개념에서 빌렸는데, 여기서 “자연의 법”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과 모든 인간의 양심에 새겨진 도덕법의 일반적 계시를 의미한 것이고, “하나님의 법”은 성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계시한 도덕법을 의미한 것이다. 로크는 이에 대해 리처드 후커(1554~1600)와 같은 16세기 성직자들을 인용할 뿐 아니라 로마서 1장과 2장을 인용하기도 한다.


또한 ‘자연법’은 ‘영국 보통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헨리 드 브랙튼(1210~1268)부터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가장 많이 인용한 법 철학자 윌리엄 블랙스톤(1723-1780)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도덕법 혹은 ‘창조법’을 의미해왔다. 블랙스톤은 그의 대표작인 <Commentaries on the Laws of England>(1765)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한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그리고 인간의 창조주에 대한 필연적 믿음을 설명하면서 “자연법이란 피조물 인간이 따라야 할 그의 창조주의 뜻을 일컫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창세기 1장과 히브리서 11장, 그리고 로마서 1, 2장에 대한 그의 이해를 반영한 것이다.


결국 자연의 법과 하나님의 법이라고 표현된 법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의 영원불변한 도덕법을 이야기하는데, 이 도덕법은 13세기 기독교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Summa Theologica>(1267~1274)에서부터 시작하여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1536) 등, 기독교 법철학과 신학에서 정립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과 같은 교회의 신조로 일반화된 기독교 개념이다.


이처럼 제퍼슨의 “자연의 법과 자연의 하나님의 법”이라는 표현은 기독교적 맥락 밖에서 해석될 여지가 없다. 실제로 제퍼슨과 함께 독립선언문 초안위원회에 함께 했던 존 아담스는 갈라디아서 5장 14절(“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과 마태복음 7장 12절(“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 말씀을 이 “자연의 법”과 연관 지어 설명하기도 했다.


창조세계와 인간 양심에 일반적으로 새겨진 자연의 법은 초자연적으로 특별히 계시된 하나님의 법, 즉 성경말씀을 따를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 기독교의 놀랍도록 보편적이며 단순한, 그러나 동시에 비밀스럽고 신비한 ‘복음’이, 자유공화 정치철학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독립선언문 첫 문단에 심겨져 있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자명한 진리”

토마스 제퍼슨이 처음 초안위원회에 제시한 독립선언문 초안에는 두 번째 단락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다음의 진리들을 신성하고 부정할 수 없는 것(sacred and undeniable)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초안위원회의 또 다른 멤버인 벤자민 프랭클린이 “자명한 것”으로 제안해 바꾸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학자들은 이를 두고 (제퍼슨 만큼이나 세속적이었다고 잘못 평가되는) 프랭클린이 ‘신성’과 같은 종교적 표현을 거부하고 보다 이성적인 표현으로 순화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또한 미국 건국정신에서 기독교를 제거하려는 세속주의 학자들의 억지 해석이다. 왜냐하면 프랭클린이 제안한 ‘자명한 것(self-evident)’이라는 표현도 매우 기독교적인 이해와 배경, 그리고 성경적인 맥락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이 ‘자명한 것’이라는 표현은 존 로크의 또 다른 대작인 <인간지성론>(1690)에서 빌린 것인데, 여기 나타난 로크의 인식론은, 위에서 언급한 ‘자연의 법’과 마찬가지로, 토마스 아퀴나스와 리처드 후커의 로마서 1, 2장의 인간 인식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 로크는 이 저작의 제4권 제10장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인간의 인식에 대해 논의하는데, 그는 사도행전 14장 17절을 인용하면서 사람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창조세계를 통해 스스로를 증거하심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 핑계하지 못할 것”이라는 로마서 1장 20절을 통째로 인용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로 1:19)”를 원문으로 보면 phaneros en autois 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를 직역하면 ‘evident-in-self”’가 된다. 이 표현을 8세기 사제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St John of Damascus)은 라틴어로 per se notum 으로 번역했고 아퀴나스를 비롯한 중세 신학자들은 이 사도바울의 개념을 성경적 인간인식론의 철학적 토대로 삼았다. 이 라틴어 표현이 16세기 말부터 영어의 ‘self-evident’로 번역되어 미국의 독립선언문에까지 이른 것이다.

물론 인간은 죄로 인한 타락(창 3)으로 인해 그 본질이 바뀌고(엡 2:3) 생각과 마음이 어두워져(엡4:18, 롬 1:21)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며(골 1:21, 롬 8:7) 사망의 종이 된 것(롬 7:15~23)이 사실이다. 하지만 창세기 1장에서 기록된, 인간이 닮은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유지되며(약 3:9), 양심이 증거가 되어 생각들이 충돌하고 마음이 번뇌하고(롬 2:15; 7:24), 오직 그 아들의 피흘림과 성령을 통해 다시 온전한 형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신 것도 사실이다(롬 8:29, 골 3:10, 엡 4:24).


이런 맥락들을 살펴보면, 제퍼슨이 기독교 신앙보다 이신론적 신념에 가깝고 프랭클린이 다소 세속적인 삶을 살았다는 일부 역사학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더라도, 이들이 “다음의 진리들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드린다”라고 썼을 때 그것은 로마서 1장을 포함한 성경복음의 깊은 이해와 그 표현이 오랫동안 쓰인 기독교적 맥락, 그리고 창조주를 닮은 그들의 양심의 발로였다고 볼 수 있다.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권리”

그렇다면 이 자명한 진리들은 무엇인가? 이제 독립선언문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핵심대목이다. 바로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창조되었으며,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와 같은 양도 불가능한 일정한 권리들을 부여받았다”라는 ‘천부인권’의 선포다. 독립선언문을 소개한 대부분의 번역에서 이 부분을 “동등(혹은 평등)하게 태어났고”로 오역해 놓았지만 분명 created equal”이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선언문은 사람의 권리가 그 어떤 세상의 왕이나 정부가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 창조주가 각 인간에게 동등하게 부여하는 것임을 틀림없이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미국의 국부들이 의미했던 하나님이 추상적인 이신론적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나 막연한 초월적 질서가 아니라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인격적(personal) 창조주 하나님임을 알 수 있다.


헬라철학의 신, 혹은 ‘부동의 동자’는 창조주의 개념과 거리가 멀다. 헬라의 철학자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상상력과 어떤 신성한 ‘에너지’에 대한 두려움을 담아 풍성한 다신론적 신화를 만들어냈지만, 그들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알지 못하는 신(행 17:23)”이었을 뿐이었고 피조물과 분리된 개념이 아니었다.


또한 그 철학은 창조주에 대한 개념이 모호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동등한 권리를 각 인간에게 부여하는 주권자를 담아내지 못했다. 그들에게 ‘권리’란 사회와 국가의 산물이었을 뿐으로 이 선언문에서 말하는 ‘천부인권’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의 권리는 결코 인간 간 동등하지 않았고 힘이나 우연의 논리로 우열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결국 이 철학이 로마제국에 이르러서는 국가가 곧 신이 되고 왕은 사제가 된다.


반면,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인간의 권리는 언제나 창조주의 주권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일단 ‘권리’를 뜻하는 히브리어의 ‘미쉬파트(mishpat)’는 맥락에 따라 ‘정의’ ‘재판’ 혹은 ‘제도’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는 권리가 단순한 인간 간 계약이나 배분적 차원의 개념이 아니라 규범적이고 도덕적 차원의 ‘옳음’을 이야기함을 말해준다. 영어로 권리를 ‘right’라고 하는 것도 같은 연유다. 권리와 정의와 재판은 모두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사 30:18, 신 1:17, 창 18:25) 인간의 모든 공정과 형평의 기준도 하나님의 공의인 것이다(출 21:1, 신: 16:18, 17:8~9, 잠 1:3).


지면의 제한으로 ‘생명’과 ‘자유’라는 양도 불가능한 권리들은 생략하더라도 약간 오해의 여지가 있는 ‘행복의 추구’는 여기서 언급할 필요가 있다. 로크는 <통치론2>에서 3가지 기본권을 생명권, 자유권, 소유권으로 명시한바 있다. 일부 세속주의 학자들은 제퍼슨이 로크의 ‘소유권’ 대신 ‘행복추구권’을 명시한 것을 두고 미국인들의 어떤 감각적이나 쾌락주의적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그들의 또 다른 성경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행복(happiness)이란 영국 보통법의 전문어로서, 미국 국부들이 종종 인용한 영국의 법철학자 윌리엄 블랙스톤의 정의에 따르면 “인간 개인이 창조주의 법을 순종함에서 비롯되는 현세 속에서의 축복받은 만족감”을 의미했다. 즉, 행복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을 살 때 주시는 은총(축복)이라는 것이다.


행복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역시 성경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한 기독교 철학에서 비롯된다. 일례로 라틴어 beatus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 happy인데 beatus마태복음 5장에서 ‘복(blessing)’으로 번역된다. 제퍼슨은 로크의 분류를 따라 소유권을 명시하는 대신 (물론 소유권도 당연히 성경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보다 해석의 여지가 넓고 대중에게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행복추구권을 명시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순리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권리들을 지키기 위해 인간들 중에 정부가 수립되었고”

이 선포는 인간 정부의 목적과 분명한 한계를 명시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권리들을 지키고 보장하기 위해 정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목적을 보장하지 못할 때 그 정부는 정당성을 잃는다는 의미가 된다. 또한 정당한 정부권력은 “피치자의 동의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정부가 그 정당성을 잃을 경우, 국민의 저항과 그 폭정의 폐기는 마땅한 의무가 된다. 이 원리 또한 성경과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나온다.


우선 위에서 말한 모든 인간의 권리(미쉬파트-정의-right)가 그러하듯 왕의 권리도 하나님의 정의를 나타내는데 까지만 정당하다(삼상 13:13~14; 밷전 2:14; 롬 13:4; 잠 16:12 등). 그리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준수하지 못함으로 왕이 정당성을 상실하였을 때 피치자들은 새로운 언약을 타결하고 합법적으로 새 정부를 세울 수도 있다(예. 대하 22~23장). 이 기초위에 기독교의 “혁명론”과 자유와 인권의 담론이 시작된다.


서양법제사의 권위자인 헤롤드 버만은 그의 <법과 혁명>(1983)에서, 서양법 전통이 특히 12세기 교황혁명(그레고리오개혁),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 그리고 17세기 영국 청교도혁명이라는 3대 기독교 혁명을 통해 자유와 권리의 담론을 포함한 근대 서구문명의 지성사가 발달되었음을 보여주었다. 12세기 교황혁명의 불꽃은 영국으로 건너가 대헌장으로 열매를 맺었고 대헌장은 영국의 보통법으로 발전했다. 16세기 종교개혁과 17세기 영국혁명이 낳은 칼빈주의와 청교도정신은 미국 건국의 정치사상적 기초와 사회문화적 토대를 제공한 것이다. 그 뿌리에는 성경과 유대-기독교 전통이 있다.



“최고의 재판장께 호소하며 ... 신성한 섭리의 보호를 굳게 의지”

선언문은 이어서 미국인들에 대한 영국왕의 27가지 권리침해 사례를 나열하고 마지막 문단에서 영국과의 완전한 분리를 선언하며 자유독립국을 선포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성경의 하나님을 언급하는데 이전 문단과는 다른 이름을 사용한다. 바로 “세상 최고의 재판장(Supreme Judge of the world)”과 “신의 섭리(Divine Providence)”이다.


이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선언하는 것은 사실 미국인들에게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농민들로 구성된 민병대가 당시 세계 최강의 영국군을 상대로 승산이 매우 낮은 전쟁을 선포하는 일이었으며, 미국인들 중에도 여전히 영국 왕에 충성하는 세력들이 많았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56명 중 9명은 직접 전투에 참전했고 5명은 영국군에 붙잡혀 극심한 고문 끝에 죽었다. 또 12명의 집은 불태워졌고 3명의 아들들은 전투에서 사망하거나 포로가 되는 등, 56명의 서명자 대부분 재산과 가족을 전쟁으로 잃었다.


그래서 그들은 독립을 선포하면서, 영국의 폭정에 대한 그들의 기소장을 어떤 우연이나 추상적 존재에 고발한 것이 아니라 세상 최고의 재판장(창 18:25)이신 하나님께 호소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을 희생해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섭리에 전쟁의 결과와 후손들의 운명을 온전히 맡겨드렸다. 자유민주공화정의 종주국은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숭고한 믿음으로 건국되었다. 현재 절체절명의 체제적 위기를 맞는 대한민국의 크리스천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참고자료

Gary T. Amos (1989) Defending the Declaration: How the Bible and Christianity Influenced the Writing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Wolgemuth & Hyatt Publisher.

David VanDrunen (2006) A Biblical Case for Natural Law, Acton Institute.

John Witte, Jr. and Joel A. Nichols (2016) Religion and the American Constitutional Experiment (4th edition), Oxford University Press.


(이 글은 기독교세계관 월간지 <월드뷰> 12월호에 기고된 글입니다.)

Comments


bottom of page